해외여행

60828 간디기념관에 방문 (1)

松宙 2006. 8. 28. 10:17

마니바반(MANI BHAVAV) : 간디기념관

 

마니바반~ 여기는 1917년\부터 1934년까지 봄베이 간디운동 본부로 사용된 집으로서 마하트라 간디의 지도아래 인도인들이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저항운동을 기년하기 위한 곳이다.

이곳에서 간디는 진리와 비폭력이라는 불멸의 이상에 기초한 국가를 만들어 갔다. 1919년 4월6일 간디가 처음으로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민중투쟁을 시작해 영국의 신민지 지배기반을 흔들었던 곳도 바로 이곳이며, 간디의 마니바반 체제중에는 국가의 운명이 좌우되는 중요한 결정도 행해 진곳이 이곳이다.

이 신성한 건물은 현재 인도 정부에의해 국립기념관으로 지정되어 1층에는 간디의 저서외 그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그것들에 관한 모든 책들이 비치되어 있으며, 2층에는 간디가 사용했던 방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간디가 처음 실짜는 법을 배운곳도 그리고 그가 병들었을때 처음으로 양의 젖을 마신곳도 이건물 이방에서였다. 이곳은 간디의 삶에대한 생애를 한눈에 알수 있도록 사진들과 모형으로 그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다.

1932년 1월4일 새벽 이곳에서 간디는 언제나 처럼 잠자고 일어아 아침기도중 체포되었으며, 지금에는 그를 기리는 인도인들의 성지로 그의 기념관으로 보존 관리되고 있다.

 

모한다스 카란찬드 간디

(힌디어: मोहनदास करमचन्द गांधी, 구자라트어: મોહનદાસ કરમચંદ ગાંધી, 1869년 10월 2일 - 1948년 1월 30일)는 인도의 정신적·정치적 지도자로,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운동을 이끌었다. 인도의 화폐인 루피의 초상화에서도 그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의 본명은 우리가 알고있는 마하트라 간디가 아니고 모한다스 카란챤드 간디이나 후세에 인도정부에 의해 우리말에 의해 성만 그대로 쓰고 이름을 위대한 간디라 바꾸어 부르며 그게 이름처럼 사용되고 있다. 

업적

그는 일생 동안 정치적인 목적을 위한 폭력(테러리즘 참고)을 거부했는데, 그의 비폭력주의는 나라 안뿐만이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영향을 주었다. 1918년 인도 국민회의의 지도자 역할을 맡은 것을 전후로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서면서, 간디는 인도의 상징 중의 하나가 되었고,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의 '마하트마'로 불리게 되었다. 간디 자신은 이런 명예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지금도 마하트마 간디로 불린다.또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3년간 거주하면서 변호사자격으로 노동자들의 인권을 옹호한 사회운동경력도 간디의 업적중 하나이다.

비판

간디는 활발한 사회운동을 했지만, 노동자들에게 간디는 기득권층을 위한 지식인에 불과했다. 실례로 그는 1917년 파업권이 없는 노동조합결성지원을 자본가들에게 제의,인디아 구자라트주의 노동운동을 침체시켰다. 이는 활발한 노동운동으로 권리를 쟁취해 간 봄베이의 노동자들과는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또한 1935년 가족임금제도(가족중 한 명이 실직시,다른 가족의 임금을 인상)를 받아들여,여성과 노인노동자들이 해고당하게 하는등 사회적 약자의 편에서 일하지 못했다.1차세계대전때에는 인디아의 전쟁가담을 주도했는데,이는 그의 비폭력주의와는 모순되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