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이야기

(시사) 퇴직임원의 중국경영 성공기

松宙 2005. 8. 27. 06:41

"중국에 진출한 국내 기업의 미래가 황혼이 될지, 새벽이 될지는 경영자에게 달렸습니다"

국내 중견기업 임원직에서 물러난 후 중국으로 진출해 300억원가치의 중소기업을 일궈낸 노(老)기업인의 중국경영 성공기가 화제가 되고 있다. 화제의 주인공은 중국 산동성 칭다오시(청도, 靑島)에서 설악피혁 현지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최희영(60, 사진) 부동사장 겸 총경리(국내기업의 대표이사격).

최씨가 양수기와 선풍기 등을 생산하는 국내 굴지의 전기용품업체 신일산업에서 물러난 것은 영업상무로 재직하던 지난 91년이었다. 내 사업을 해봐야겠다는 꿈과 회사의 경영권 이양 과정에서 자리를 잡기 어려운 것이 큰 이유였다.

퇴직 후 7 ~ 8년간 개인사업으로 무역회사를 운영하던 최씨가 중국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처남인 원익수 설악산업 대표이사의 권유에서였다. 원재료를 공급해 완제품을 납품받는 임가공업 형태로 중국 제조업체를 이용했던 원 대표는 물류비 부담과 들쭉날쭉한 제품의 품질을 직접 관리하기 위해 중국 현지 공장을 운영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믿고 공장 운영을 맡길 수 있는 적임자를 찾지 못 했고 공장 운영 경험이 있는 처남 최씨에게 상의를 했다. 신일산업에서 공장장까지 지낸 최씨는 기회의 땅이라는 중국에서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어 '내가 맡겠노라'고 자청하고 나섰다.

처남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중국어 학원에 등록하는 등 준비작업에 들어간 최씨가 중국에 발을 디딘 것은 2000년. 당시 국내 기업인들은 칭따오에 몰려들었지만 중국인(한족)과 조선족들과의 관계가 골치거리였다. 현지 한국기업인과 한족 사이의 통역을 맡았던 조선족들은 한국기업들의 진출이 많아지면서 몸값이 껑충 뛰었고 월급을 많이 준다는 곳으로 옮겨가기 일쑤였다.

현지 조선족들을 가족처럼 대하는 최씨의 설악피혁에서는 조선족이 회사를 옮기는 일이 거의 없었고 이는 공장이 빨리 자리잡는데 큰 도움이 됐다. 1년 넘게 걸리는 토지이용 허가증을 현지 관청에서 얻는데도 한두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최씨는 "수백만 중국교포들의 조상은 독립운동이나 돈 때문에 정든 고향을 등졌을 것"이라며 "조선족이라는 표현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지금도 중국교포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현재 400여명에 달하는 젊은 여성 근로자들은 최 대표를 집안 할아버지처럼 스스럼 없이 대한다.

최씨가 젊음을 불살랐던 신일산업은 80년대 말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노사 분규가 격화됐을 때 삼성전자와 더불어 공장의 작업라인이 멈추지 않은 보기드문 사업장이었다. 당시 공장장이었던 최씨는 500여명의 근로자들로부터 자기소개서를 받은 후 일대일 면담으로 임금, 가정사 등 어려움을 직접 들어주는 방식을 썼다. 중국에서도 이 방법은 큰 효과가 있었다. 현지 중국인들의 고민도 돈과 가정 문제 등 결국 한가지더라는 것이다.

사업이 자리를 잡으면서 총 900만 위안(120억원)을 들인 중국 공장의 현재 가치는 2000만 위안(280억여원)까지 껑충 뛰었다. 일본의 하쿠바, 마루요시사와 국내의 영원무역 등을 제품공급선으로 확보해 올해 매출액 목표도 1000만 달러(110억원)에 이른다. 임금이 슬금슬금 오르고 있지만 생산성을 두배로 올리자며 직원들을 독려하고 있다.

최 대표는 산동성을 오리에, 칭다오를 오리의 목에 비유했다. 목을 움켜쥐면 오리를 뜻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듯이 칭다오를 잘 이용하면 우리 기업의 중국 진출 전진기지로 삼을 수 있다는 것. 최씨는 "15만의 칭다오 중국교포들과 따뜻한 관계를 맺어 결실을 거두면 2000만 북한 동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자연스레 알 수 있게 될 것"이라며 말을 맺었다

 

 

송주가 옮겨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