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이야기

답답한 "샌드위치 코리아"

松宙 2007. 2. 20. 07:36

출처: 중앙일보 & Joins.com


"한국 자동차? 앞으로 5년 안에 따라잡을 것이다."

중국 상용차 시장 1위 업체인 베이징푸톈자동차(北京福田汽車) 셰쯔칭(子淸) 부원장의 장담이다. 이달 초 베이징에서 만난 그는 "BMW.벤츠.도요타 같은 세계적 브랜드는 힘들겠지만 한국 차는 품질만 따라잡으면 된다"고 말했다.

"삼성이 최첨단 LCD 패널 공장을 돌릴 수 있느냐 없느냐는 우리한테 달렸다."

일본의 첨단 기술 기업 알박(Ulvac)의 우스미 다카유키(臼見隆行) 경영기획실 부장의 지적이다. LCD 패널 핵심 기술인 성막(成膜)장치 분야에서 세계시장의 96%를 장악하고 있는 일본 기업의 자부심이 잔뜩 담겨 있다.

외환위기 발생 10주년, 노무현 정부 출범 4주년을 맞은 한국 경제의 현주소가 답답하다. 기업 팔고 금붙이까지 내다 팔아 국가 부도 위기는 넘겼지만 앞으로 10년, 20년을 이끌어갈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아내지 못하는 사이에 이웃 중국에 바짝 쫓기고 일본과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는 상황을 맞은 것이다. 특히 중국.일본과는 주력 산업이 비슷해 세계 시장에서 3국간의 각축전이 치열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2월 취임사에서 "이젠 한국이 동북아 시대의 중심 국가로 가자"고 강조했다. 그러나 4년이 흐른 지금 '중심 국가' 대신 '샌드위치 신세'를 걱정하기에 이르렀다.

중국의 추격은 무서울 정도다. 저비용을 무기로 세계의 공장 역할을 했던 중국이 기술로 무장하면서 자동차.철강 등 핵심 제조업 분야는 물론 첨단 기술 분야에서도 한국을 위협하고 있다. "한국이 자랑하는 이동통신장비의 기술 격차는 2005년 현재 1년. 2010년이면 6개월로 좁혀진다. 3.5년 정도인 TFT-LCD(초박막액정표시장치) 분야의 기술 격차는 2010년까지 1.7년으로 줄어든다." 최근 본지가 입수한 '중국의 부상 및 동북아 분업 구조 변화에 따른 우리의 대응 전략' 보고서 가운데 일부다. 이 보고서는 한국개발연구원(KDI)과 대외경제연구원(KIET) 등이 지난해 말 대통령에게 보고했던 내용이다.

지난해 10년 불황을 벗어난 일본 역시 힘차게 뛰고 있다. 지난 회기(2006년 4월~2007년 3월) 일본 기업들의 국내 제조업 설비투자는 전년 대비 21.3% 증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설비투자 증가율이 6.8%(산업자원부, 200대 기업 설비투자 조사)이며, 올해는 이보다 낮을 전망인 한국과는 대조적이다. 투자 부진에 노사 불안까지 겹치면서 한.일 양국 간의 생산성 격차도 다시 벌어지고 있다. 양국 간 노동생산성 격차는 1995년 시간당 29.3달러에서 2005년 29.9달러로 확대됐다. 여기에 엔화 가치가 지속적으로 떨어지는 엔저(低)까지 가세하면서 자동차.가전 등 주력 분야에서 한국 제품보다 가격이 싼 일본 제품들이 속출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샌드위치 현상은 비단 경제 분야만의 고민이 아니다. 외교 안보와 국방, 교육은 물론 문화 부문에 이르기까지 한국이 비교 우위를 급속히 잠식당하면서 중국과 일본에 밀리는 경향이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위기를 벗어날 해법은 무엇인가. "이대로는 안 된다. 더 늦기 전에 국가 경영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야 한다"는 한국경제연구원 노성태 원장의 지적에 전문가.기업인 모두 동의하고 있다.

◆샌드위치 코리아=고효율의 일본과 저비용의 중국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여 꼼짝 못하게 돼 가는 한국의 현실을 담은 표현. 최근 이건희 삼성 회장이 우리나라 상황을 샌드위치에 비유하면서 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더욱 커지고 있다.

특별취재팀 = 양선희(팀장).이현상.권혁주.김창우(이상 경제부문) 기자, 도쿄=김현기 특파원 (biznews@joongang.co.kr ) ▶이현상 기자의 블로그 http://blog.joins.com/leehs92/
마쓰시타 사장 `한국 기업 독주 더는 볼 수 없다` [중앙일보]
[샌드위치 코리아] 다시 뛰는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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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남단 가고시마(鹿兒島)현 공항에서 북으로 20㎞를 가면 야마하 반도체 공장에 닿는다. 피아노 회사로만 알고 있던 야마하가 이 평범한 시골 공장에서 반도체를 만들고 있다. 각종 데이터를 소리로 전환하거나 내려받은 음악을 고음질로 듣게 하는 음원칩이 주종목이다. 120년 전 오르간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축적한 풍부한 음원 자료에 첨단 기술을 접목하면서 세계 시장을 석권했다. 삼성.LG전자 등의 고급 휴대전화에도 이 칩이 꼭 들어간다. 가격은 10달러에 육박하고, 연간 2억 개나 팔린다. 하마다 요시토(濱田禎人) 사장은 "음원 기술이 결합한 이 칩은 다른 반도체 회사는 만들 수 없다"고 말했다.

일본 기업들에는 이처럼 오랜 내공으로 다져진 원천 기술이 무기다. '잃어버린 10년'에도 '우리 방식대로'를 외치며 불황을 빠져나온 저력은 이런 '묵은 힘' 덕분이다. 일본의 재도약은 폭발적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사상 최고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지난해 경상수지 흑자(19조8400억 엔), 상장기업의 예상 경상이익 증가율(6.5%)도 모두 사상 최고 실적이다. 이 와중에 한국은 지난해 대일본 무역적자(253억 달러)가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해외시장과 미래 투자도 적극적이다. 9일 오전 가나가와(神奈川)현 가와사키(川崎)시에 있는 후지쓰 공장. 100여 명의 연구자가 '수퍼 컴퓨터' 설계에 매달려 있다. 이들의 목표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컴퓨터' 만들기. 1154억 엔을 쏟아부어 1초당 1경(1조×10000)번의 연산능력을 갖춘 수퍼컴을 2011년까지 만들 계획이다. 현재 최고속인 미국 IBM의 수퍼컴보다 35배나 빠르다.

일본 내 290개 주요 기업의 지난해 연구개발 투자는 전년보다 7.4% 늘어난 10조7000억 엔이다. 미래에 먹고살 수종사업 확보를 위한 투자다. 샤프의 태양전지 사업, 도시바의 소형 연료전지 상용화 시도 등이 그 사례다. 외국 기업 인수합병(M&A)에도 적극적이다. 2004년 58억 달러였던 M&A 규모는 2005년 151억 달러, 지난해 상반기에만 121억 달러를 기록했다.

미국에도 밀리지 않던 반도체.전자.조선 등에서 밀려 악몽으로 떠올랐던 한국 기업에 대한 자신감도 되살아나고 있다. 일본 굴지의 자동차 회사에 충돌 분석 시뮬레이션 장치를 공급하는 일본의 한 IT 업체는 최근 납품 중인 일본 업체에 "현대차와 거래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이 회사가 조금이라도 불편해 하면 한국 진출을 포기할 참이었다. 그러나 "신경 쓰지 말라"는 회신이 왔다. "현대차는 아무리 애써봐야 세계 6위다. (우리 경지에 오려면) 10년은 더 걸린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들이 마련한 한국 기업 견제 구도도 만만찮다. 지난해 히타치.마쓰시타.소니.도시바.NEC 등 9대 전자 업체들은 3조 엔의 설비투자를 했다. 잃어버린 평판TV.반도체 시장을 되찾아오겠다는 결의다. 일본기업 간 경쟁구조도 바뀌었다. 규모의 경제를 위해 기업 간 사업 통폐합과 합병에 적극적이다. 여러 기업이 생산해온 D램 반도체가 삼성에 밀리자 엘피다 메모리로 통합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경쟁업체끼리 연합도 한다. 도시바.르네사스 테크놀로지.NEC.후지쓰의 반도체 4사는 최근 최첨단 반도체인 32나노급 반도체에서 규격을 통일했다.

일본 기업들은 98년 러시아 금융위기 당시 대거 철수했던 러시아 시장에도 재진출하고 있다. 당시 철수하지 않았던 한국 기업들이 기반을 잡은 데 대한 반성을 바탕으로 실지 회복에 나선 것이다. 도시바는 지난해 러시아에 판매법인을 설립했고, 도요타도 상트페테르부르크 부근에 조립공장을 건설했다. 마쓰시타의 오쓰보 후미오(大坪文雄) 사장이 올 초 기자회견에서 밝힌 "더는 한국 기업의 독주를 볼 수 없다. D램과 같은 실패 사례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발언도 이 같은 일본 기업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